설야 2
고죠유지
13


더 이상 신역에 침입한 인간 남매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겨울의 용은 신사로 내려갔다. 산 초입, 신역과 인간 영역의 경계에 자리잡은 신사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을 제외하면 무척 깔끔했다. 신의 것은 시간마저도 피해 가는 탓이리라. 평소에는 무녀인 우타히메가 관리하고 있기도 했고.

직감을 따라 본전으로 향한 그는 한복판에 바쳐진 그것을 발견했다.

의식은 이미 끝났고 제물을 바친 인간들은 도망치듯 재빨리 사라졌다. 누워 있는 것은 인간 하나뿐이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해 앳된 얼굴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흉터가 두 개나 자리잡고 있었다. 제물로 바칠 것이면 보통 잘 먹이고 곱게 기르지 않던가? 고죠는 의아함을 느꼈다. 바쳐진 남자—소년과 청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듯한—는 빈말로라도 영양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실 영양 상태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검은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가슴 한복판에는 의식용 단도가 깊숙이 꽂혀 있다. 정확히 심장을 노렸으니 살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종이로 만든 색색의 꽃들 사이에 누워 있는 그는 신에게 번제(燔祭)된 짐승과 그 신세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방금 느꼈던 가슴의 통증은 무엇인가.

고죠는 제물로 바쳐진 남자를 살펴보았다. 서늘하게 빛나던 푸른 눈은 이내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차갑게 타오르는 태양과 검은 달그림자가 자아낸 맹약의 실은 남자에게서 제게로 이어져 있었다. 숨이 끊어졌는데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는 오래된 규율이 이 땅에 성립하던 옛 시절의 신들과 용들을 떠올렸다. 수많은 제물이 바쳐졌고 때로 누군가는 그 제물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산 채로 바쳐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죽은 제물과의 사이에 연이 이어져 봤자 무엇도 이뤄질 수 없다. ……죽은?

“설마.”

그는 의식용 단검의 자루를 잡았다. 주술이 음각된 단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짜였다. 인간의 문명이 거의 망하고 겨울이 계속되는 이 세상에서, 잘도 이런 물건을 구했다. 밀려오는 복잡한 정보의 파편들, 예지와 다를 바 없는 예감을 무시하듯 머리를 비우며, 고죠는 단검을 잡아 뺐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순간 피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생각하였으나 그는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았다.

깊이 팬 가슴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갔다. 근섬유가 엮이고 피부가 재생해 덮이기 직전, 고죠는 깊은 곳에 숨겨진 붉은 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벌어진 채 피를 쏟아내던 심장은 희미한 흔적만을 남긴 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고 이내 맥동하기 시작했다.

두근.

심장이 뛰고 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맥박이 제게도 전해졌으므로.

“이미 묶여 버렸나…….”

고죠의 목소리에 드물게도 난처함이 묻어났다. 일식의 순간에 되살아난 오래된 규율은 제물로 바쳐진 인간을 제게 종속시켰다. 본래대로라면 숨이 끊어졌으니 그조차도 금세 무효가 되어 흩어졌을 테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물은 심장을 재생하고 살아났다.

둘 사이의 실은 여전히 창백한 빛을 발하며 이어져 있다.

고죠 사토루의 것이 된 이 인간은, 이제 그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으리라.

새하얀 손끝에서 새와 비슷한 물체가 피어올랐다. 몇 번 날갯짓한 그것은 이내 세상의 틈바구니로 사라졌다. 오래된 벗인 약선(藥仙)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보낸 고죠는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한다. 부수고 무너뜨리는 건 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인간을 돌볼 능력 따위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우라면 좋은 마음으로 선뜻 나섰겠지만 자신은 그와 달랐다. 인간종을 향한 친우의 애정 따위 이해할 수 없었다.

희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종이꽃 사이에 누운 모습이, 이제는 애처럼 보였다. 그 옛날 어느 비극 속의 여자는 꽃들과 함께 물에 잠겨 세상을 떠났다지. 죽음의 문턱을 막 건너갔다 돌아온 소년에게서 희미한 꽃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볼 수 없을,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결코 피지 않을 꽃들.

‘인간은 약하고 무력하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거야, 꽃들처럼.’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려 묶은 친우가 웃었다. 그는 지배종 중에서도 드물게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나는 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거참 안됐구나. 위대한 용신께서 풍류조차 즐길 줄 모르다니.’

‘뭐, 이 자식아? 따라와. 모처럼 지어 놓은 정자 부수기 싫으니까.’

이 산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적이 있었더랬다. 지나간 날의 단편이 문득 떠올랐으나 이내 흩어졌다. 드문 일이다. 하루에 두 번이나 옛 일이 생각나다니. 고죠는 손을 뻗어, 이제는 제 것이 된 이름 모를 소년을 건드려 보았다. 차가운 손끝에 닿은 입술에서는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인간을 어떻게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


“헉……!”

이타도리 유지는 눈을 떴다. 낯선 목조 건물의 천장이 보였다. 지금 무슨 상황이었지? 츠미키를 데리고 후시구로와 함께 도망치다가, 젠인 나오야에게 잡히고, 그리고…….

“큭…… 쿨럭……!”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그는 이내 피 섞인 기침을 몇 번 했다. 두들겨 맞은 뒤 쓰러졌었고, 그 뒤는 드문드문 흐린 의식으로만 기억날 뿐이었다. 분명히 칼로 찔렸던 것 같은데. 가슴팍 부분을 더듬은 그는 의아해했다. 정말 찌른 것처럼 옷은 가슴 부분이 찢어져 있는데, 정작 찔렸을 가슴에는 구멍이 없었다. 그게 다 환각이었나? 어떻게 된 거지?

어쨌거나 죽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유지는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로 된 꽃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진짜 제가 제물로 바쳐지긴 했다는 느낌이 들어 가짜 꽃들이 어쩐지 징그러웠다.

본전 밖으로 나선 유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사에는 온 적이 없다. 젠인가의 일부 인간들만 여기까지 올 권리가 있었다. 유지처럼 그 영역에 살기를 ‘허락받은’ 일반인은 대체로 물자 수급을 위해 옛 도시의 폐허를 돌아다녔다. 소위 말하는 폐지 줍기가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남자는 폐지 줍기, 여자는 젠인가의 각종 허드렛일. 그런 말도 안 되는 권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젠인가의 무력 탓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축복받은 땅’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바쳤다고 진짜 젠인가에 축복받은 땅을 더 주면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안 드는데.”

작게 투덜거리는 유지의 발밑에 눈이 밟혔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일부 건물 앞은 눈이 치워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얗게 쌓인 눈이 그대로 남겨진 채였다. 이래서는 결국 건물들도 죄다 눈에 파묻히지 않을까. 막 도리이 쪽으로 나가려던 그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앞으로 나가 봤자 길은 하나뿐, 젠인가의 감시자와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차라리 산을 타넘는 게 나을 수 있다. 길은 험하겠지만, 후시구로 남매도 그쪽을 택한 것 같았으니 따라잡기도 그편이 좋을 것이다.

신사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의 귀에 무슨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린 것은 , 막 포도(鋪道)를 벗어나 산으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가 자리를 비워서 일어난 일이잖아.”

“난들 가고 싶어서 갔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튼 나는 인간 같은 거 돌볼 줄 몰라.”

“누구는 알아서 이래? 이미 묶였다며. 그러면 여기 있을 수밖에 없잖아.”

“우타히메가 알아서 해, 난 신경 끄고 싶으니까.”

“내 제물이야? 네 권속…… 야, 야! 고죠!”

다투는 듯한 남녀의 대화가 뚝 끊기고, 신사 사무소 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도망치려던 유지의 걸음이 그 자리에 묶였다. 모습을 드러낸 남자 탓이었다.

저보다 훌쩍 큰 키의 사내는 온통 흰색이었다. 새하얀 하오리를 걸친 백발 장신의 남자 역시 유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쪽을 빤히 보았다. 거리는 좀 있었으나 어쩐지 유지는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들여다보듯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는 드물게 맑은 날의 하늘처럼 푸른 색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어째서?

“…….”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남자를 바라보던 유지는 문득 찬바람에 메마른 눈을 깜빡였다. 유지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이미 백발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허전해졌다. 그건 환영이었나? 아니면 실재(實在)하는가? 멍하니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뒤따르듯 안쪽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왔다.

“고죠! 그냥 가면 어떡…… 아.”

오래전 할아버지가 폐허 틈에서 주워 온 그림책 속 무녀와 같은 복장을 한 여자는, 유지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번 사람은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아, 유지는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 처음 뵙겠슴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여자는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망치듯 사라진 자가 다시 나타날 일은 없어, 결국 제 몫이 된 일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차가 놓였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이고 흉터가 생긴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온기가 마음에 들었다. 차 같은 기호품은 일년에 한 번 접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기도 하고.

이런 귀한 것을 거리낌없이 내주는 상대에게 경외심 비슷한 것을 느끼며 유지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얼굴을 가로지른 큰 흉터가 있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이오리 우타히메라고 해. 일단은 여기 신사의 관리를 맡고 있어.”

“이타도리 유지임다.”

“그…… 뭐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난처한 듯 말을 고르는 우타히메를 위해, 유지는 우선 제가 알고 있는 것부터 이야기하기로 했다. 물어보면 설명도 해 줄 것 같으니 딱히 정보를 먼저 넘긴다 해서 잘못될 것도 없고.

친구 누나가 제물로 바쳐질 위기여서 함께 도망치다가 붙잡혔다, 아마 제가 대신 제물로 바쳐진 것 같다, 일어났더니 종이꽃 사이에 누워 있었다, 정도의 짧은 이야기였지만 우타히메가 말을 시작할 지점을 잡기에는 적절했다. 길게 한숨을 쉰 우타히메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맞아, 너는 제물로 바쳐졌어. 그런데 여러 사정이 하필 안 좋게 맞물리는 바람에…… 여기의 신에게 묶여 버렸지.”

“신이 진짜 있어? 아니아니 그전에, 묶이다니.”

“말 그대로야. 이 일대를 지배하는 용신의 권속 같은 게 된 거야.”

“권속? 부하 같은 거?”

“비슷하지만 좀 다르지. 일단…… 이제 너는 이 신역 일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야기를 끝낸 뒤 당장이라도 후시구로를 찾으러 가려던 이타도리 유지의 계획은, 시작부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