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 3
고죠유지 AU


잠시 난처한 침묵이 오갔다. 자신이 들은 말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끔벅이던 유지는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못 벗어난다고?”

“이 일대를 벗어날 수 없어. 권속이니까 주인이 같이 있으면 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주인.”

“이 일대를 다스리는 놈…… 아니 신……말이야. 너를 제물로 받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지 우타히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지의 머릿속에 아까 본 남자가 문득 떠올랐다. 온통 새하얀 남자, 눈동자만은 어쩐지 맑은 날의 하늘처럼 티 하나 없이 푸른 색이던. 환영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신이라는 말에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얀 사람 말하는 거야?”

“고죠를 봤어?”

“아까 밖으로 나왔을 때 잠깐. 바로 사라져서 헛걸 봤나 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그 자식…… 마주치고도 모른 척 그냥 가 버렸단 말이지.”

우타히메가 이를 갈았다. 저 귀찮은 일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성격이니 이번에도 그렇게 내뺀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한들 어찌할 방법은 없어서, 상황을 채 모르고 눈만 끔벅이는 유지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우타히메의 몫일 따름이었다.

“고죠는 용신이야.”

“고죠, 가 이름이야?”

“인간계에서 지낼 때 쓰는 가문명이지.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고죠가 너랑 이야기를 좀 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튀었으니 어쩔 수 없네.”

잠시 머뭇거리던 우타히메는 조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타도리 군은 내 권속이 아니니까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뭔데?”

“일단은 여기 머물면서 신사랑 주변 관리를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른 신의 권속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꼴이니 조심스러웠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타도리 유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어차피 당장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고죠가 변덕을 부려 데리고 나가지 않는 한은 무리일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고. 그러나 불안정한 미래와는 상관없다는 듯, 유지는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


“하아…….”

눈을 치우던 유지는 잠시 멈춰선 뒤, 차갑게 언 손에 입김을 불어 녹였다. 고죠를 모시는 신사에서 신세지게 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크게 가리는 것 없는 성격 덕분에 유지는 빠르게 신사 생활에 적응했다.

찬바람을 피할 방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유지는 제게 주어진 것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받은 방은 깔끔하고 외풍도 들지 않는 데다가 푹신한 요와 이불까지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망가져 어딘가 한 곳은 꼭 바람이 들고, 이불 같은 좋은 물건은 젠인가같은 지배세력에나 들어가는 데다, 제대로 된 난방은커녕 겨우 장작을 때서 연명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다.

잠자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 뒤에 주어진 것들은 유지의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안에 있는 식료품은 절대 상하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다는,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채소와 고기 같은 것이 가득한 식재료 창고를 보여 주며, 우타히메는 대수롭지 않게 ‘혼자 먹는 것 정도는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말했다. 용신인 고죠나 상계와 하계를 잇는 신인 우타히메는 딱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고, 신의 보좌로 수행 중인 이지치 키요타카 역시 굳이 인간의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래전 인간들이 바쳤던 채소와 곡식, 고기와 향신료 등은 먹을 사람을 기다리며 보존되어 있었다. 긴 폐지줍기 끝에 간신히 멸망 전 세대의 통조림 같은 거라도 발견하면 운이 좋은 날로 생각했던 유지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문득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와 함께 여기 올 수 있었다면, 적어도 돌아가시기 전에 배불리 드실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풍족한 식료품을 볼 때마다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때로 해 주었다. 지금처럼 끝나지 않는 겨울이 계속되기 전, 세상이 녹아내릴 듯 작열하는 여름이 일어나기도 전, 언젠가 인세는 무척 풍요로웠다고 했다. 언제 터질지 몰라 아슬아슬한 폭탄 같은 긴장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먹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있었다고. 그 좋은 시절이 끝나기 직전에 태어난 유지는 그때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들려 주는 옛 이야기를 통해 막연히 그때를 상상하고는 했다. 일하면 음식을 ‘살’ 수 있고,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라니. 그게 낙원 아닌가?

그러나 결국 여름이 왔다. 그리고 여름을 부수듯 더 냉혹한 겨울이 왔다. 할아버지는 ‘인간들이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유지는 그 개념을 잘 몰랐으나, 지금의 젠인가 같은 놈들이 더 커다란 규모로 온갖 짓을 벌였다는 말에 어렴풋이 납득했다. 우리의 죄가 크다. 할아버지는 그러한 말 끝에, 그러니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힘겨운 상황을 수행하듯 견디면서 손 닿는 데까지 타인을 돕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봄이 올 것이라고.

봄. 이타도리 유지는 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봄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이며, 꽃이 피고 달콤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화사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꽃잎이 흩날리는 것만을 보기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닌다고. 새로이 시작하는 계절이기에 가슴에는 희망이 가득하고, 따스한 바람에 마음이 설렌다고.

유지가 아는 계절은 오직 겨울뿐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했다. 봄은, 여름은, 그리고 또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눈이 녹고 나무에 꽃이 피어난다는 게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유지의 상식에서 눈이 녹는 것은 식수로 쓰기 위해 끓일 때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장작을 때지 않아도 춥지 않은 세상은 얼마나 다정할까.

“읏차. 마저 치우고 오늘 저녁에는…… ‘목욕’해야지.”

여기 와서 새로 배우게 된 개념 중 하나였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와 유지를 처음 만난 이지치가 목욕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할아버지가 철저히 가르쳤기에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사는 유지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목욕이라는 건 처음 겪었다. 물이나 물을 적신 수건 같은 것으로 몸을 닦아내는 게 아니라, 기분좋을 만큼 뜨거운 물에 들어간다니. 살기 위해 장작을 때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할 사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작이 없어도 그런 게 가능했다. ‘신력으로 움직이는 보일러’라는 설명을 이지치가 해 주었지만 그냥 그런 것이 있구나, 했다. 신력이라면 어쨌거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여기 머무는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꿈 같은 시간이라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신사 경내에 쌓여 있던 눈은 어느덧 깨끗하게 치워졌다. 식사를 제대로 하고 휴식까지 취하면서, 유지의 체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덕분에 이전에는 몇몇 자주 가는 곳 근처만 치워져 있던 것을, 아예 경내 전체에 쌓인 눈을 싹 밀어내 정리했다. 그간 쌓인 눈이 지긋지긋했었는지, 우타히메는 연신 유지의 어깨를 치며 대단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정도면 잡일꾼으로 잘 자리잡은 모양이다. 어차피 산 아래 젠인가의 영역에서 살 때도 하는 일은 기껏해야 폐지줍기였던 만큼, 유지는 여기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곳을 떠난 후시구로의 안부가 걱정되는 점을 제외하면.

유일한 단점이자 자신이 여기 머물 수 있는 이유가 그거였다. 신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자신을 제물로 받은 ‘고죠’가 데리고 나간다면 가능하다기에 부탁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처음 한 번 스치는 환영처럼 잠깐 본 이후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이지치는 ‘원래 맡은바 임무 때문에 바쁘신 분’이라고 했고, 우타히메는 ‘그 자식 귀찮아서 도망 다니는 거야’라고 했다. 둘 다 맞는 말 같았다.

“후시구로…….”

후시구로 남매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안전한 거처를 찾았을까? 산을 넘어 새로운 동료를 찾았을까?

츠미키가 제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도주하기 바빴으니, 그 뒤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친구인 쿠기사키에게도 떠난다는 말만을 간신히 남길 수 있었다. 젠인의 영역을 벗어나자고만 했지 그다음에 어디로 갈지는 정해지지 않았었다. 자신보다 머리가 좋은 후시구로라면 뭔가 계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젠인가의 횡포에도 사람들이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끝없는 겨울에도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을 소유해 식량 공급권을 쥔 것이 그중 하나였고, 또 다른 이유는 젠인가가 가진 무력 때문이었다. 그 무력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 주로 사용되긴 했지만 ‘들판’의 것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눈이 내리고 끝없는 겨울이 계속되면서 인간의 거주지는 점차 좁아져 갔다. 수많은 인간이 얼어 죽었다. 관리를 받지 못한 건물은 무너지고 도로에도 눈이 쌓여 긴 빙판과 다르지 않았다. 죽어 버려진 생명에게서 태어난 생물 아닌 무언가가 들판을 떠돌았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악의를 품었고, 그럴 기회만 주어진다면 인간을 습격했다.

그러니 추위와 괴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일반인들은 젠인가 같은 강자에게 신변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자식들,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츠미키를 죽이려 했고 결국 자신이 죽을 뻔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의 세력 아래 살고 있는데, 그 목숨을 뺏긴다면 그들이 ‘들판’의 그것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유지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그 불손한 눈빛을 진작 알아챈 그들 역시 유지를 꼴도 보기 싫은 놈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이타도리?”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유지는 홱 시선을 돌렸다. 젠인가에서 허드렛일을 맡은 남자 중 한 명이 저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에는 눈삽이 들린 것이, 아무래도 신사를 청소하러 온 모양이었다. 도리이에서 본전까지의 길이 평범한 인간들에게 허락된 참배의 영역이라고 이지치가 설명해 줬던 게 기억났다. 신이 진짜로 있다고 생각하는 —놀랍게도 나오야의 말이 진짜이기는 했다— 놈들이니 최소한의 관리를 하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시, 심장을 찔러서 바쳤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가 살아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부러 삐딱하게 받아치며, 유지는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영양실조에 가까웠을 때도 젠인 나오야를 맞아 분투했던 만큼 지금은 장정 여럿이 달려든다 해서 유지를 어떻게 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고작 한 사람이라면 유지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히이익……!”

유지가 한 걸음 성큼, 다가서자 남자는 기겁하며 등을 돌려 달아났다. 저대로 젠인가에 이야기가 전해지면 귀찮아진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저를 여기 있게 해 준 우타히메나 이지치에게도 민폐를 끼치게 된다. 유지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내달렸다. 간신히 도리이를 지난 남자의 어깨를 잡으며, 몸이 도리이 밖으로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두근.

“컥……!”

날카로운 실이 심장을 옭아매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살을 저며내는 고통에 유지는 비틀댔다. 손에서 풀려난 틈을 타 남자는 달아났다. 눈앞이 흐려졌다. 어째서? 휘청이던 유지의 손이 도리이의 기둥을 짚었다. 여기는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구분짓는 경계. 도리이 안쪽은 신의 영역이지만, 이 바깥은.

“못 나간다는 게…… 이런…… 뜻…….”

고통이 점차 심해지고 의식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도리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안간힘을 다해 힘겹게 움직인 유지는, 저를 받아드는 너른 품에 얼굴을 묻으며 그대로 기절했다.


***


‘먼저 가, 후시구로.’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저 좋을 대로 믿어 버렸다. 금방 따라오겠다는 그 말을. 누이도, 그도 다 살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누이를 살리기 위해 그를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제 힘이 부족해서.

‘죽지 마라.’

위선과 다를 바 없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친구를 등뒤에 둔 채 누이와 함께 도망쳤다.

젠인 나오야가 능히 사람을 죽일 자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저 제 손에 둘 다 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미, 메구미.”

“안, 돼. ……리, 같이…….”

“메구미!”

헉, 숨을 집어삼키며 후시구로 메구미는 눈을 떴다. 타닥, 탁, 장작 타는 소리와 섞여 저를 깨운 것은 누이의 목소리였다. 걱정 가득한 츠미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

땀을 꽤 흘렸는지 몸이 흥건했다. 차가운 바람에 그대로 식어가는 듯해, 메구미는 장작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토매틱 무브먼트의 시계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새벽 네 시 십 분. 일어나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차라리 제가 좀 더 불침번을 길게 서는 게 나을 것 같아, 메구미는 제 누이에게 말을 건넸다.

“깨워 줘서 고마워. 내가 불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어서 자.”

“깊이 잠들지도 못했잖아. 너 고작 두 시간 잤는데…….”

“깨어 있는 게 마음 편해. 얼른 눈 붙여.”

무어라 더 말하려던 츠미키는 메구미의 다물린 입에서 고집을 읽고 물러났다. 모포를 몸에 두른 뒤 침낭 속에 웅크린 츠미키는, 이내 잠들었는지 조용한 숨소리만 들렸다. 메구미는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모닥불 속으로 장작을 하나 더 밀어넣었다. 불꽃이 마른 나뭇가지에 옮겨붙어 밝게 타올랐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남자의 허락 덕분에 산을 넘은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낮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밤에는 빈 폐허를 골라 추위를 피했다. 산 너머 빈 거리에는 그것들이 없었지만, 어느 지점을 경계로 점차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할 때는 메구미 본인이 나섰다. 피로가 계속 누적되어 간다.

메구미는 지도와 작은 나침반을 꺼냈다. 길을 읽는 법은 어찌어찌 배울 수 있었다. 후시구로 메구미에게서 발현된 이능, 그림자를 다스리는 힘 덕분에 젠인가에 반쯤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폐지 줍는 하층민들을 통솔하기 위해 가르친 독도법(讀圖法)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남매의 도주를 돕고 있었다.

길은 아직 멀었다. 후시구로 메구미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젠인가에 반기를 들고 나간 젠인 마키, 그의 동갑내기 당고모가 바로 그 찾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망했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은 인간들은 어떻게든 질긴 목숨을 이어 갔다. 위험한 들판을 가로질러 물자를 거래하는 재주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떠돌이 상인들에게 소문을 들었다. 신체능력이 어마어마한 여자가 젠인가의 영역 밖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고. 탈주한 지는 1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마키가 반(反)젠인을 위해 세력을 키우고 있다면 거기에 의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낱 같은 희망이었지만 그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어차피 거기가 아니라면 딱히 갈 수 있는 곳이 있지도 않고.

그렇게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을 찾으면, 츠미키를 맡겨 놓고 돌아가야 했다.

이타도리 유지는 후시구로 메구미가 처음으로 구한 사람이었다. 폐지를 줍던 중, 갑작스럽게 괴물들이 들이닥쳤던 적이 있었다. 그때 폐지줍기에 끼어 있던 이타도리 유지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메구미는 제 이능으로 유지와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네 덕분에 다른 사람도 살고, 나도 사람을 구할 수 있겠어.’

조용한 종말이 들이닥친 세상에서 티 하나 없이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후시구로 메구미는 이타도리 유지를 구한 것이 어쩌면 제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누군가를 도우려 애썼고 기본적으로 쾌활했다. 이타도리 유지가 속한 조는 늘 분위기가 좋았다. 늘 피로에 찌들어 있는 하층민들도 이타도리와 마주할 때면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띠고는 했다. 그러나 불의를 두고보지 않는 그 성격 때문에 젠인가와는 마찰이 잦았다. 과도한 할당량에 허덕이는 이웃을 위해 제 것을 나눠 주고 처벌을 받거나, 누군가의 딸이 끌려가는 것을 막으면서 젠인가의 힘깨나 쓴다는 놈을 때려눕히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메구미가 감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후시구로이지 젠인은 아니었고, 제게는 지켜야 할 누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츠미키가 제물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말을 듣고 함께 도망가자고 어렵게 부탁했을 때, 이타도리의 승낙을 들으며 메구미는 안심했다. 누이도, 친구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하지만 자신은 결국 친구를 내버려둔 채 도망쳤다…….

“……살아만 있어라, 이타도리…….”

메구미는 얼굴을 감싼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는 여전히 매서울 뿐이었다.


***


고죠가 그 아이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 덕분이었다.

인근 들판의 그것들을 청소하고 돌아오던 그는, 발아래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았다. 눈을 치우고 있던 제물, 산을 올라 도리이를 넘어서다 제물을 본 사내, 그를 쫓아가다 제물이 도리이를 넘는 것까지.

가슴에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제물이 느낀 것만큼 격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신호 정도는 되었다. 역시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구나. 담담하게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제물의 앞으로 내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물은, 아니, 소년은 제 품으로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받아 안은 그에게서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너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친우의 목소리가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스구루.”

반발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쓸개라도 삼킨 듯 씁쓸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그저 산에 들에 자리잡은 식물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는 것. 피어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때로는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그러나 찰나와 같은 삶을 살며 객체가 아닌 군체로서 존재하는 것. 수많은 생명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그러니까 이것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무소로 걸음을 옮긴 고죠는 소파에 소년을 내려놓았다. 유지가 깨끗하게 치워 둔 경내를 창 너머로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던 우타히메가 당황해서 달려왔다.

“때렸어?!”

“우타히메는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제물이 제게 묶인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기로서니 신 된 자로서 일개 인간을 때리겠는가? 진심으로 때렸다가는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죽이는 것으로 관계가 정리된다면 모르지만 오래된 규율은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시체가 제게 영영 묶여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은 일이 될 게 뻔했다.

“뭐로 보겠어? 귀찮은 일 피하려고 도망 다니는 한량으로 보지.”

“나랑 굳이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잖아. 어느날 갑자기 웬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서 내가 네 주인입네, 하면 받아들이겠어?”

잠깐 생각에 잠겼던 우타히메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걔라면 받아들일 거 같긴 한데.”

“뭐?”

“아니, 그보다. 이왕 얼굴 맞댄 김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좀 얘기해 봐.”

고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역시 잔소리 폭탄. 귀찮다. 좀 더 도망 다닐 걸 그랬다. 하필 제가 보는 앞에서 쓰러질 건 또 뭐람. 어쨌거나 제게 바쳐진 권속인데 그대로 영역 밖에 팽개쳐 둘 수도 없었다.

“눈 피하지 말고. 네 권속이잖아.”

“오래된 규율, 깰 방법 있을까?”

“있겠냐고.”

“하아아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적어도 우타히메나 자신 같은, 하계에 주로 기거하는 신이 알기로는 그럴 방법이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상계의 기록을 열람하는 거지만, 끝나지 않는 겨울을 불러온 고죠에게 상계 기록관의 입장 허가가 날 리 없다.

“쇼코한테 부탁하면…….”

“연단(練丹) 일만으로도 바빠서 죽을 거 같은 애한테 기록관 뒤지기까지 시키려고?”

“우타히메는?”

“나도 너무너무 바쁘지. 너 때문에. 출입 허가도 안 나겠지. 네 편을 들었으니까. 이번에도 상계에 불려가서 잔소리만 잔뜩 들었지. 네가 위의 말을 안 듣는다고.”

작열하는 여름과 끝나지 않는 겨울 건으로 상계의 신들이 죄다 고죠를 적대할 때, 고죠의 편을 들었던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가 우타히메였다. 지은 죄가 있어 고죠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우타히메에게 부탁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이지치는 아직 견습이라 출입 자격이 안 되고.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진지하게 고민 좀 해 봐. 지금이야 내가 신사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타도리 군도 본인의 생이 있잖아.”

“이타도리?”

“이름도 몰랐어? 아니…… 그럴 만하네. 바쳐진 뒤로 맨날 도망다녔으니.”

우타히메는 이런 쓰레기가 다 있나, 하는 눈으로 고죠를 보았다. 고죠의 시선은 잠든 소년에게 꽂혀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은 빛을 반사하며 분홍색으로 반짝였다. 얼굴에 난 흉터를 빼면 무척 앳된 아이였다.

“이타도리 유지. 열다섯이래.”

“안 물어봤어.”

짧게 대답한 고죠는 잠깐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렇게 작아?”

“인간이니까.”

고작해야 이십여 년간 이어진 자연재해로 인간의 문명은 무너지고 멸종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종말 이후에 태어난 아이라니.

“신기해…….”

자신이 무어라 중얼거렸는지, 고죠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우타히메는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하고 말을 이었다.

“싫어도 한 번은 제대로 마주해야 해. 계속 신사에서 살게 하든가, 영역 내 어디든 나가서 살라고 하든가, 네 권속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뭘 시키든가…….”

“일단은…… 여기 있게 해 줘.”

“일단은 그렇다 치고, 그다음은?”

“……좀 지켜보고 생각해 볼게.”

허튼소리나 싫은 티 내기는 절대 자제하지 않는 성질머리지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한 것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우타히메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지금껏 고죠에게 바쳐진 무언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신변을 의탁하고자 신사로 들어와 다짜고짜 드러누운 인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과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겨울을 끝낼 봄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