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밤에 홀로 걸었소
부서진 눈 잠기는 호수 곁에서.
눈 내리는 밤에 홀로 걸었소
흐른 눈 바스러지는 산 나무 아래.
눈 내리는 밤에 홀로 걸었소
내리는, 내리는 눈 쌓인 끝없는 들판.
“헉, 헉…….”
거친 숨소리가 폐허와 메마른 나무 사이에 부딪쳤다. 보도블럭의 잔해와 나뭇가지 같은 것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뿌드득, 짓밟힌 눈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세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을을 벗어나 벌써 10분째 도망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젠인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산과 가까운 이 거리는 젠인가 휘하에 들어간 인간들이 때때로 물자 수급을 위해 들르는 장소 중 하나였다. 좀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어서, 츠미키. 가야 해.”
매서운 눈매의 남자가 재촉했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바탕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츠미키라 불린 여자는 좀처럼 다시 달리지 못했다. 전력으로 그만큼 달렸으니 체력이 바닥날 만도 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내가 업을게.”
묵묵히 곁을 지키던 후드를 쓴 남자 쪽이 입을 열었다. 막 돌아서서 등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하이고, 쌔빠지게 도망가더만 요까지밖에 못 왔나? 느그도 참 대책없데이.”
빈정대는 목소리가 반파된 상점가 건물 사이에서 들려왔다. 흠칫 놀람과 동시에 두 남자는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늘을 벗어난 남자의 얼굴이 차가운 햇살 아래 드러났다. 이런 환경에서 잘도 머리를 물들이고 피어싱으로 치장한 것은 그의 입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 어딘가 매서운 눈매의 사내와 닮은 구석이 있는 듯도 한 얼굴에는 비열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젠인 나오야.”
“메구미, 누이가 제물로 뽑혔다고 도망가면 쓰나? 신께 바쳐야제.”
메구미라 불린 매서운 눈매의 사내 쪽은 이를 갈았다. 그의 누이, 츠미키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분명히 젠인 나오야가 있다. 그러잖아도 후시구로 남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으니까, 제 아버지인 젠인 나오비토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츠미키를 처리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메구미가 누이를 위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이참에 젠인가에 거스르는 불순분자를 줄이기 위해서.
“신 같은 게 있다면 세상을 이 꼴로 내버려두진 않았겠지. 너도 마찬가지고.”
“신은 있다. 내가 직접 봤거든. 제물을 바치면 노여움을 거두고 축복받은 땅이라도 좀 더 내려주실지도 모른다. 다같이 먹고살아야 될 거 아이가?”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나오야의 눈에 기묘한 희열 같은 것이 얼핏 흘렀다. 그는 히죽대며 연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그 여자 내놔라. 까놓고 말해서 친누이도 아니면서.”
“이 자식이……!”
후시구로 메구미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막 손으로 무슨 모양을 만들려던 찰나, 후드를 쓴 남자가 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먼저 가, 후시구로.”
막 타오르려던 분노가 일순 억눌러져 자취를 감췄다. 나오야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토우지 군이랑 비슷해 보였는데 호부견자 아이가, 생각하며 그는 앞을 가로막은 후드 쪽을 보았다. 이쪽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름 같은 놈이긴 했으니, 먼저 처리한다 해서 딱히 나쁠 건 없다. 시간만 좀 있다면.
“이타도리, 하지만……!”
“츠미키부터 살리고 봐야지. 나도 금방 따라갈게.”
흔한 잭나이프 하나조차 없이 맨몸으로 맞설 준비를 한 후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빈약한 영양 상태 덕분에 지쳐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럴 수밖에. 후시구로를 따라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가장 빠른 나오야가 먼저 도착하긴 했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젠인가의 장정들이 곧 합류할 것이다. 멀리서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결국 셋 다 죽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죽지 마라.”
후시구로 메구미는 누이를 업고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곧 돌아올게. 돌아올게, 이타도리.
몇 번이고 맴도는 말을 입안에서만 굴리며, 후시구로 남매는 눈 덮인 산속으로 점차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서, 니가 제물 대신할라고?”
삐딱한 시선이 이타도리를 훑는다. 그러잖아도 눈엣가시였던 건 후시구로 남매만이 아니었다. 이타도리 조손(祖孫), 아니, 이제는 영감 쪽이 죽었으니 홀로 남은 저 애새끼 역시 사사건건 젠인가의 일을 방해하고 나섰으니까.
“천애고아 새끼가, 젠인가 영역에서 살게 허락해 주는 것만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이타도리는 나오야와 말을 섞는 대신 빠르게 품으로 파고들었다. 주먹을 날리려던 손길은, 그러나 이타도리보다 한 프레임이 더 빠른 나오야에 의해 옆으로 흘렀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손아귀를 앞으로 굴러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타도리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아직은 시간을 좀 더 끌어야 했다. 후시구로 남매가 신역(神域)인 산 쪽으로 도망쳤으나 눈이 돌아간 나오야라면 쫓아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왜 오늘이지?”
그래서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닌 대화라도 도움이 된다면 던져 볼 만했다. 나오야도 그 속을 알아차렸는지 코웃음을 쳤으나 의외로 순순히 답해 주었다.
“무식한 놈은 모르겠지만, 오늘은 개기일식 날이데이. 천지간이 깜깜해지모, 신이 평소보다 좀 과한 걸 받아도 위에서 모른 척해 주지 않긋나?”
“신이란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있다 카이. 내는 봤다. 그래서 지금 메구미를 안 쫓아가는 거 아이가.”
“……뭐?”
이타도리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나오야는 낄낄 웃었다.
“신역으로 들어갔으니까. 어차피 살아서 못 나간다.”
“그게 무슨…….”
“아, 진짜 돌대가리네. 봐라, 신이 있고, 글마들은 신역에 쳐들어갔다. 신이 가만히 있긋나? 신벌이라도 내리겠지.”
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이타도리였으나, 눈앞의 사내가 기묘한 확신에 차 있는 것을 보며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신이란 게 정말 있다면 후시구로는.
순간 한 무리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오야가 부리는 젠인가 휘하의 남자들이었다. 아무리 몸 쓰는 게 자신있다지만 상대할 인원이 늘어나는 게 좋은 일일 리는 없다. 그러니…….
퍽!
이타도리가 판단하느라 생각을 빼앗긴 찰나, 강한 충격이 일었다.
“내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네, 건방지그로.”
단번에 거리를 좁힌 나오야의 일격이 이타도리의 명치에 작렬했다. 컥,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쇠파이프나 각목 같은 것들이 날아들었다. 이미 여러 번 합을 맞춰 온 듯 빠져나갈 빈틈이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퍽, 퍽. 둔탁한 소리를 배경 삼아 물러난 나오야는 쯧, 혀를 찼다.
“아쉬운 대로 저거라도 제물로 올려야긋네.”
찢어진 상처를 타고 피가 흐른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며, 이타도리는 의식을 잃어 갔다.
눈이, 눈이 내린다.
흔들리는 세상이 일그러져 쏟아진다. 저를 내려다보는 나오야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엉망으로 뭉개져 있다.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귀로 파고들지만 이해할 수 없다. 세상과 유리된 채 이타도리는 나오야 뒤로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게 타오르는 태양이 새까만 달그림자에 점차 가려진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무언가를 기원하는 광신도의 기도와 더불어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어두운 하늘 한복판에 금륜(金輪)만이 가락지처럼 떠올라 빛나고 모든 것이 뒤섞이는 순간.
푹.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이타도리 유지는 제 심장이 차가운 칼날에 찔린 채 맥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존재 자체가 세상과 벌어진 듯 아득하던 감각이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무언가와 제 사이에 실낱같이 이어진 선이 점차 굵기를 더해 갔다. 하늘의 금륜이 거대한 어떤 존재와 자신을 이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영영 끊어낼 수 없을 세상의 인과, 신의 섭리. 점차 풀려난 태양의 빛이 전과 달리 강렬하다고 여기며, 이타도리 유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새하얀 남자는 눈을 떴다.
가끔 눈이 오지 않는 맑은 날의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 속 동공은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신역에 침입했다. 그는 대체로 일하는 걸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아주 손에서 놔 버리지는 않았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킨 남자는 이내 사라졌다.
유령처럼 사라진 남자가 나타난 곳은 어느 남매의 앞이었다. 산속에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리던 남매는 처음에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코앞까지 다다르고 그가 입을 열고 나서야 뒤늦게 존재를 깨달았다.
“너희는 무슨 연유로 여(余)의 땅에 발을 들였느냐?”
문어체에 가까운 질문이 던져졌다. 어조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위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본능이 시킨 까닭이었다. 이 남자는, 아니,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되 내면에 든 것은 자신들과 결코 같지 않다.
두려움에 떨던 둘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의 새하얀 옷자락과 발치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후시구로 메구미 쪽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저 아래에 사는 남매입니다. 제 누이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 하여 몸을 피하다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무감한, 정확히는 조금 귀찮은 눈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제물이라,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분명 인간과의 교류는 우타히메가 맡고 있었고, 신역의 경계에 지어진 신사로 가끔 인간이 찾아올 때면 제물을 원치 않는다는 말로 돌려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이었던가. 하필 우타히메가 상계(上界)와의 업무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인간들이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너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우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말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제 친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이 뭐라고, 그것들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여서, 그렇게.
“사, 산을 넘어가면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부디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회상에 잠기려던 그를 깨웠다.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다른 인간들이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사실 이 둘이 지나가는 것 정도는 그냥 봐줘도 될 일이었다. 아니, 아니, 괜찮은 일은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 여기를 지나간 것, 무엇도 입밖에 내지 마라.”
하여 그는 남매를 보내 주기로 했다. 더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오랜만에 옛 기억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팅-
몸을 돌려 자신이 기거하는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순간 멈춰 섰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둠에 잠식당한 태양이 창백한 빛을 흩뿌렸다. 금륜이 푸른 눈동자에 테두리처럼 둘러진 찰나,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가해졌다. 끊어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과의 끈이 이어졌다. 무엇인가가 제게 바쳐졌다.
창백한 겨울의 용, 고죠 사토루는 그것이 어쩌면 제 운명임을 깨달았다.